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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힌 골목에서 꺼낸 질문들』 신간 출간(박성진, 곰단지)

느리게 번져 이 골목을 벗어나 우리의 오늘까지

장세환 2025년 11월 19일 오전 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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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힌 골목에서.jpg출판사 제공

존재하지만 발견되지 않은 곳에 귀를 대는 책이 나왔다. 진주 옥봉의 좁은 골목을 따라가며, 벗겨진 페인트와 녹슨 초인종, 주름진 손의 온도를 기록한다. 떠난 이들이 남긴 빈집과 남아 버틴 이들의 숨을 같은 프레임 안에 담아, 우리가 잊은 일상과 말 걸지 못한 얼굴을 다시 불러낸다.

작가는 오래된 대문 앞에서 멈춘다. “나는 빨간 대문집이야.” “우리 집은 초록 대문이야.” 주소보다 색이 먼저인 동네. 표준화된 현관문이 도시의 얼굴이 된 시대에, 이 골목의 대문은 여전히 집과 사람의 정체성을 증언한다. 눌리지 않은 채 바래어 가는 초인종 하나가 말을 건다. “세상과 이어지는 가장 작은 장치”였던 그 버튼을 작가는 끝내 누르지 않는다. 대답을 강요하지 않는 기록, 숨을 고르게 하는 사유가 대신 문을 두드린다.

사진과 글의 호흡은 간결하고 느리다. 프레임은 낮고 가까우며, 문장에는 서두르지 않는 여백이 있다. 콤코무리한 곰팡내와 햇살, 벽면의 낙서와 덧칠의 층위를 함께 비춘다. “악착같이 살았다.” 동네 어르신의 한마디는 신파가 아니라 태도다. 이름이 불리지 않아도 삶을 잇는 힘, 잊혀져도 꺼지지 않는 체온. 책은 그 힘이 버틴 시간의 결을 손대지 않고 보여준다.

이 기록은 향수의 앨범이 아니다. 사라질 것들의 목록을 적는 대신, 지금 여기의 온도를 측정하고 질문을 남긴다. 도시의 표면에서 미끄러져 내린 감각을 다시 붙잡고, 비슷한 골목 어디에서나 일어나는 일상적 존엄을 복원한다. 걷는 독자에게는 지도의 좌표가 되고, 남아 사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자리와 말을 되찾아 주는 증명서가 된다.

기억과 공간을 아카이빙해 온 박성진은 “보이는 것 너머의 맥락과 여백”을 쫓아 장면을 수집한다. 골목을 지나가던 독자는 페이지를 넘기며 발걸음을 늦춘다. 녹은 빛과 그림자 사이로 작은 안부가 스민다. 눌리지 않은 초인종이 오늘은 조용히 울리는 듯하다.

장세환

언론출판독서TV

2025년 11월 19일 오전 02:19 발행
#잊힌골목에서꺼낸질문들#박성진#곰단지#인문교양#도시기록#진주옥봉#사진에세이#기억아카이빙#대문과초인종#로컬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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