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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격조했습니다』 출간(이동순, 창비)

반세기 편지 묶음으로 되살린 한국문학의 얼굴과 시대의 숨결

장세환 2025년 11월 10일 오전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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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격조했습니다.jpg출판사 제공

한국 시단의 원로 이동순 시인이 반세기 동안 동료 문인·사회 인사들과 주고받은 친필 편지를 한 권에 엮은 산문집 『그간 격조했습니다: 편지로 읽는 한국문학의 발자취』가 창비에서 출간됐다. 작가가 보관해온 편지 중 엄선한 38인의 편지 64점을 중심으로, 편지를 둘러싼 사연과 시대의 공기를 덧붙여 근현대 문학사의 장면들을 현재형으로 불러낸다. 활자보다 먼저 손끝의 온기가 남는 육필이 기록의 주어가 되면서, 이름으로만 기억하던 ‘문단’이 구체적인 얼굴과 목소리로 다가온다.

책은 김광균·김규동·김춘수·박용래 등 선배 시인들의 단정한 필체에서 시작해, 김지하의 결연한 문장과 황석영의 옥중 엽서, 백낙청·염무웅·최원식 등 평론가들의 토막 메모까지 한자리에 모았다. 백석의 연인으로 알려진 김자야의 편지는 ‘자야체’라 불릴 만큼 고유한 손맛을 간직해, 시인의 생애를 비춰주는 드문 사료로 읽힌다. “끝까지 산정의 깃발을 내리지 말라” 같은 문장은 격동의 세월을 관통한 문학의 신념을 생생히 증언한다.

1970~80년대 검열과 탄압의 흔적도 숨김없이 드러난다. 국가보안법과 폐간 조치가 일상을 덮치던 시간, 편지 봉투 한 귀퉁이에 찍힌 ‘검열필’ 도장은 그 자체로 시대의 주석이다. 원고 제목 하나에도 ‘맹물 같은’ 중의적 장치를 고민해야 했던 사연은, 문학이 어떻게 현실과 부딪치며 언어의 출구를 찾았는지 보여준다. 동시에 정호승·안도현·도종환 등 동료들의 안부와 축하, 계절의 인사를 오가는 대목에서는 문학 공동체의 연대와 우정이 잔물결처럼 번진다.

형식은 간결하다. 편지 원문을 앞세우고, 그 배경과 이후의 행적·문학사적 의미를 저자가 덧붙인다. 편지가 도착한 장소, 종이의 재질, 삐뚤빼뚤한 획의 방향 같은 사소한 디테일이 기억을 환기하는 장치가 되고, 사라진 목소리들은 새로이 응답을 얻는다. 문자메시지와 메일이 지배하는 오늘, 이 책은 “느리게 도착하지만 오래 남는” 소통의 미학을 복권하며, 한 사람의 삶이 다른 사람의 삶을 어떻게 북돋우는지 증거한다.

『그간 격조했습니다』는 기록의 재현을 넘어 현재 독자를 향한 초대장이다. 누군가에게 미루던 안부 한 통, 건네지 못한 감사 한 줄을 다시 쓰게 만드는 힘이 편지들 사이에 깃들어 있다. 이동순은 머리말에서 “닿지 못한 마음이 다시 누군가의 가슴에 물결처럼 번지길 바란다”고 적었다. 반세기의 손글씨가 건네는 그 바람은, 오늘의 독자가 내일의 편지를 시작할 이유가 된다.

장세환

언론출판독서TV

2025년 11월 10일 오전 02:56 발행
#그간격조했습니다#이동순#창비#육필편지#한국문학사#문단사#김지하#황석영#백석자야#산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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