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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소에서 건져 올린 한 세기의 기억”, 『구씨네 정미소』 출간(이경희, 자유의 길)

가족사로 읽는 식민지와 전쟁 그리고 산업화의 생활사

장세환 2025년 10월 27일 오전 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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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씨네 정미소.jpg출판사 제공

자유의 길이 이경희 장편소설 구씨네 정미소를 펴냈다. 한 집안의 흩어진 사연에서 출발해 식민지와 전쟁을 지나 산업화에 이르는 한국 근현대의 궤적을 정미소라는 생활 현장으로 끌어와 보여주는 작품이다. 삶의 결이 정미소에서 빻아낸 쌀처럼 고단하면서도 맑다는 작가의 의식은 떠난 자와 남은 자가 교차하는 장면들로 이어진다.

이 소설은 구씨 가문의 오래된 저주로 상징되는 기억의 무게에서 문을 연다. 언청이 형제를 둘러싼 냉혹한 시선, 도태리를 떠나는 결심, 제물포와 당산마을로 이어지는 터전의 이동이 차례로 놓이면서 잃은 것과 지켜야 할 것의 경계가 선명해진다. 머슴의 딸 춘화와 맏아들 만석은 사랑보다 생존에 가까운 동거를 시작하고, 청자다방을 거점으로 하루를 버티며 서로를 삶의 도구로 삼아야 했던 세대의 현실을 떠안는다. 실종된 맏아들 백석의 부재와 동생 천석에 대한 형의 연민, 가족 내부의 냉기와 바깥 세계의 폭력이 포개지면서 집과 공동체의 의미가 흔들린다.

작품의 중반부는 전쟁과 이념이 일상의 언어를 압도하던 시절의 풍경을 담는다. 인민재판의 장면은 남루한 정의감과 군중의 열기가 개인의 삶을 어떻게 밀어낸지를 보여주는 핵심 축이다. 말미의 줄다리기와 축제는 폐허 위에서 다시 관계를 잇고자 한 사람들의 몸짓을 상징처럼 배치해 상처의 서사를 삶의 의식으로 전환한다.

소설은 인물의 선택을 선악의 단정으로 몰지 않는다. 국밥집과 다방, 정미소와 항구라는 생활의 무대가 먼저 보이고, 그 위에서 버텨야 했던 몸과 마음이 뒤따른다. 그래서 질문은 자연스레 독자에게 돌아온다. 우리는 무엇을 이어받았으며 무엇을 이미 잃었는가. 지금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인가.

구씨네 정미소는 가족사와 지역사가 겹쳐지는 지점에서 한국적 근현대의 체험을 문학으로 환기한다. 산업화와 농촌의 변화를 직접 겪은 세대에게는 잊힌 풍경을, 젊은 독자에게는 조부모 세대의 체온을 불러낼 것이다. 도서관과 학교 현장에서는 생활사 자료로도 쓰임이 넓다. 정미소의 기계음과 항구의 소음, 다방의 새벽 청소와 같은 세부를 통해 이 작품은 역사를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손에 잡히는 노동과 이동의 감각으로 복원한다.

작가는 등단 이후 여성과 노년, 폭력과 돌봄의 문제를 꾸준히 탐색해 왔다. 이번 신작에서도 한 사람의 생이 공동체의 기억으로 확장되는 순간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책장을 덮는 자리에서 남는 것은 화려한 결말이 아니라 버팀의 문장들이다. 그것이 이 소설이 건네는 가장 단단한 위로다.

장세환

언론출판독서TV

2025년 10월 27일 오전 06:28 발행
#신간#한국소설#근현대사#가족서사#정미소#생활사#기억과유산#공동체#여성서사#문학신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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