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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상에서 추리하고 현장에서 뒤집는다”, 『언제 살해당할까』 출간(구스다 교스케, 톰캣)
병원 4호실의 유령과 팔천만 엔의 행방을 좇는 정통 본격 미스터리 구스다 교스케 국내 첫 완역으로 트릭의 미학을 환기
출판사 제공
쇼지 병원 4호실에 입원한 소설가 쓰노다가 한밤마다 유령을 본다. 팔천만 엔 횡령과 동반 자살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는 악명 높은 병실이다. 이 불길한 방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침상에 누운 작가는 머리로, 오랜 친구 이시게 경감은 발로 수사를 이어간다. 일본 본격 추리의 고전적 묘미를 압축한 구스다 교스케의 장편 『언제 살해당할까』가 톰캣을 통해 국내에 처음 번역 출간됐다.
작품은 제한된 무대와 제한된 단서에서 시작한다. 창살이 박힌 창, 밤마다 삐걱대는 경첩, 낙서와 물소리, 지문과 주삿바늘 같은 촉각적인 단서들이 병실 내부에 촘촘히 배치된다. 쓰노다는 침상에서 데이터와 상상력을 결합해 모순을 지워 나가고, 이시게는 전국을 누비며 빠진 조각을 채운다. 두 사람의 역할은 교차하며 가속이 붙는다. 경찰 상부의 압박, 밤중의 습격, 유치한 협박장까지 겹치며 두 인물은 말 그대로 언제 살해당할지 모르는 경계선 위로 올라선다. 독자는 폐쇄된 방의 정적과 추격전의 동적 긴장을 번갈아 경험하며 결말을 향해 끌려간다.
서사의 중심에는 트릭이 있다. 구스다는 의사를 절대시하는 사회적 습관과 제도의 사각을 이용해 완전 범죄의 상상력을 밀어붙인다. 범인을 압박하는 것은 요란한 반전이 아니라 논리의 누수다. 자물쇠와 창살, 소리와 흔적, 약물과 이동 동선이 한 치의 빈틈 없이 맞물릴 때 독자는 비로소 납득의 쾌감을 얻는다. 전반부의 침상 추리가 퍼즐의 골격을 세우면, 후반부는 현금 통장과 독성 물질, 위장 신분과 행적 추적이 결합해 공간을 병원 밖으로 확장한다.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 플랫폼으로 뛰어내리는 장면처럼, 장면 전환은 빠르되 논리의 궤도는 벗어나지 않는다.
이번 출간은 장르 지형에도 의미가 크다. 심리 서사와 범죄 실화의 결이 강했던 최근 흐름 속에서 『언제 살해당할까』는 규칙과 트릭으로 독자를 설득하는 고유의 미덕을 되살린다. 본격 추리의 정수는 독자의 참여다. 독자는 작중 인물과 동시에 같은 증거를 보고, 같은 시간에 가설을 세우고, 같은 지점에서 허점을 찾아낸다. 구스다는 이 공정한 승부를 끝까지 지킨다. 유령 서사의 공포를 미끼로 삼되 초자연적 설명으로 도망치지 않고, 사회적 맥락을 곁들이되 논리를 희생하지 않는다.
구스다 교스케는 에도가와 란포로부터 트릭의 발명가로 불린 작가다. 면사무소 급사에서 대학 강사에 이르기까지 서른 번 가까이 직업을 바꾸며 쌓은 현장감이 작품 곳곳에 녹아 있다. 『언제 살해당할까』는 1957년 발표되어 2017년 일본에서 재조명을 받았고, 이번 한국어판은 그 전모를 온전히 소개한다.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추천사를 통해 강조했듯 이 작품은 정교한 트릭과 집요한 추적이 맞물려 마지막 페이지까지 속도를 잃지 않는다. 고전이라는 연식보다 유효기간이 긴 설계의 힘이 더 먼저 다가온다.
독서 경험은 두 층으로 쌓인다. 표면에서는 침상 탐정과 현장 수사관이라는 이중 엔진이 만들어 내는 서스펜스가 속도를 끌어올리고, 심층에서는 전후 일본 사회의 균열이 사건의 배후를 이룬다. 의학 권위에 기댄 맹신, 제도권의 은폐 본능, 돈의 흔적이 남기는 심리의 그림자가 트릭의 부품으로 쓰인다. 그래서 결말의 해명은 단지 범인을 특정하는 순간을 넘어, 우리가 무엇을 믿고 무엇을 의심해야 하는지에 대한 차분한 권고로 이어진다.
국내 독자에게 『언제 살해당할까』는 오래된 신작이다. 고전의 문법으로 지금의 호흡을 맞춘다. 탐정의 직감이 아니라 독자의 추리가 사건을 푼다는 본격의 신조, 음산한 운치가 아니라 냉정한 논리가 서늘함을 만든다는 장르의 자긍심이 한 권 안에 정갈하게 담겼다. 거대한 반전의 충격 대신 마지막 장에서 찾아오는 조용한 확신. 그 미세한 체온 변화가 진짜 고전이 남기는 잔향이다.
최준혁
언론출판독서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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