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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가 바뀌는 순간 문학이 증언이 된다, 『4인칭의 아이들』 출간(김아나, 다산책방)

제15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양정현 2025년 10월 24일 오전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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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인칭의 아이들.jpg출판사 제공

문학이 현실을 비출 때, 가장 먼저 바뀌는 것은 문법이다. 한 개인의 상처를 1인칭으로 호명하던 서술은 어느 순간 3인칭으로 멀어지고, 다시 3.5인칭이라는 흔들리는 초점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끝내 익숙한 문법 바깥으로 걸어 나가 ‘우리들’을 주어로 세운다. 최근 문단에서 회자되는 이 낯선 시점은 피해 사실의 기록 방식을 바꾸는 장치이자, 침묵을 강요받아 온 이들의 집단적 기억을 소환하는 기제다. 사건을 설명하는 대신 함께 겪은 꿈을 증거로 삼고, 가해와 방조가 엉킨 구조를 고발하는 대신 서로의 말을 이어 붙여 공동의 문장을 만든다. 그 순간, 문학은 위로가 아니라 증언이 된다.

이 새로운 시점을 본격적으로 밀어붙인 작품이 상업적 성공이나 화제성보다 먼저 윤리적 긴장을 소설의 중심에 놓았다는 점도 주목된다. 보호라는 이름으로 관리되던 공간에서 자란 아이들이 동일한 악몽을 나눠 갖는 설정은 감정의 울림보다 제도적 그늘을 먼저 떠올리게 한다. 보도용 언어로 포장된 선의가 실은 통제의 언어였다는 사실, 후원과 관심이 소비와 침묵으로 변질되는 과정을 아이들의 말로 재구성하는 장면은 지금 우리의 돌봄 체계를 향한 질문으로 직결된다. 마땅히 분노해야 할 기사들이 일회성 이슈로 사라진 뒤 무엇이 남는가라는 물음에, 소설은 시점 자체를 바꿔 답한다. 개인의 피해를 개인의 서사에 가두지 않고, 다수의 목소리로 감각과 기억을 공유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견디며 살아남은 자들이 선택한 문학적 처분이라는 메시지다.

이 작품의 긴장은 과잉 묘사나 사건의 자극이 아니라 시점의 윤리에서 발생한다. 증언은 자칫 타인의 고통을 재현물로 소비하게 만들지만, 집단의 화법은 그 유혹을 거부한다. 꿈의 조각들이 서로의 몸에 이식되듯 이어지는 장면들은 피해의 반복을 장식하지 않고, 연대의 가능성을 갱신한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면 다른 누군가의 기억이 응답하는 방식으로, 서사는 피해 이후의 세계를 조직한다. 그래서 이 소설은 불편하지만 눈을 뗄 수 없다. 문장이 끝날 때마다 낭독자가 늘어나고, 한 사람의 생일이 여러 사람의 생존 날짜로 다시 적힌다. 문학이 제도 바깥에서 제도를 감시하는 방식이 바로 여기에 있다.

뒤늦게 제목을 밝히자면, 제15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김아나의 장편소설 『4인칭의 아이들』이다. 은희경 전성태 이기호 편혜영 백가흠 최진영 박준 등 일곱 심사위원이 “타협하지 않는 서술로 3인칭에서 3.5인칭, 종내에는 4인칭으로 나아가는 방식이 독보적”이라 평한 작품이다. ‘행복한 아이들의 복지 재단’이라는 가면 뒤에 숨은 폭력과 착취를 아이들의 말로 해부하고, 동일 악몽의 공유를 통해 집단 기억을 서사의 엔진으로 삼는다. 보호의 언어가 통제의 기술로 변질되는 순간을 포착한 이 소설은, 현실 기사들이 놓친 빈 구멍을 픽션의 문법으로 메운다. 다산책방에서 출간된 이 책은, 말해지는 존재가 아니라 말하는 존재로 서는 법을 가르친다. 한 사람의 목소리를 지우지 않기 위해 더 많은 사람의 목소리를 불러오는 방법. 그 방법을 4인칭이라 부르기로, 우리는 이 소설을 통해 합의한다.

양정현

언론출판독서TV

2025년 10월 24일 오전 08:35 발행
#혼불문학상#김아나#4인칭의아이들#한국문학#집단화자#증언서사#아동보호#문학적실험#사회고발#다산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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