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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세계를 설계한다, 백승주 『다른 우주의 문법』 출간(김영사)

사전 밖에서 살아 움직이는 말의 모험, 아홉 편의 오디세이아

최준혁 2025년 10월 17일 오전 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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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우주의 문법.jpg출판사 제공

언어학자는 때때로 소설가의 가면을 쓴다. 백승주의 신작 『다른 우주의 문법』은 음성학·음운론·형태론 같은 개념을 강의실의 표에서 꺼내 삶의 장면 속에 배치한다. 유년기의 첫사랑에서 시작해 관동대지진과 제주 4·3을 통과하고, 주시경과 『자유부인』의 흔적, 바람과 파도를 읽는 ‘인어의 언어’까지—현실과 픽션을 왕복하며 언어가 어떻게 사람을 만들고 사회를 설계하는지 보여준다. 저자는 “단어는 주고받는 물건이 아니라 관계의 산물”이라고 말하며, 사전이 멈춘 자리 바깥에서 말들이 어떻게 생장하고 분기하는지 추적한다.

핵심은 역전된 시선이다. 우리는 흔히 세계가 말을 규정한다고 믿지만, 이 책은 말이 세계를 조립한다고 말한다. ‘인서울’ 같은 단어가 도시의 위계를 재설계하고, 발음 하나가 생사(쉽볼렛)를 가르던 과거가 오늘의 낙인어로 되살아나는 과정을 파헤친다. “영토·민족·언어”의 삼각형이 만든 배제의 장치, 표준과 비표준을 가르는 음운의 경계, 여성 대명사 ‘그녀’의 재발명 가능성까지—언어가 권력이고 윤리라는 사실을, 지식이 아니라 서사로 설득한다.

서술 방식도 실험적이다. 다큐와 에세이, SF와 민담이 겹치며 장르의 문턱을 흐린다. 인어가 조수와 지형에 맞춰 언어 채널을 바꾸듯, 텍스트 역시 독자를 맴도는 바람의 세기와 방향에 반응한다.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며 “익숙한 바다에서 난파”했던 경험담은, 우리가 모어라 부르는 안전지대를 낯설게 만든다. 그 낯섦이야말로 언어를 다시 배우는 입구라는 사실을 저자는 천천히 입증한다.

결국 저자가 겨냥하는 것은 ‘문법 너머의 문법’이다. 사전에 없는 테라 인코그니타, 말과 말 사이에서 생기는 미지의 틈, 사회적 상호작용이 빚는 규칙의 생성. 백승주는 그 틈을 ‘숨결’이라 부르고, 숨이 오가는 곳에서 의미가 탄생한다고 본다. 언어를 배우는 일은 규칙 암기가 아니라 공동체에 입장하는 연습이며, 그래서 말의 문제는 곧 세계관의 문제라고 책은 말한다. 기록과 상상 사이를 유영하는 이 아홉 편의 배치는 독자에게 한 가지 제안을 남긴다. 단어를 바꾸면, 세계도 바뀐다. 책은 9편을 ‘프롤로그–본문–주–참고’로 다듬어, 강의와 현장, 상상을 교차 편집한다. 「아껴 부르는 이름」, 「수심 12미터」, 「바람의 음운론」, 표제작 「다른 우주의 문법」이 이정표다. 언어를 업으로 삼은 이뿐 아니라, 말의 폭력과 위로를 체감한 독자에게도 쓰인다.

최준혁

언론출판독서TV

2025년 10월 17일 오전 04:07 발행
#다른우주의문법#백승주#김영사#언어학에세이#언어의정치#쉽볼렛#인어의언어#한국어교육#사회언어학#신간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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