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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주연 저 『우리는 모두 이불에서 태어난걸요』 출간(문학과지성사), "천에서, 유연함 속에서 시작된 우리"
"한 사람의 생애를 요약하면 장소들이 남는다" 친밀함의 지도를 펼치는 두 번째 시집
출판사 제공
우리는 어디서 태어났을까? 병원? 집? 아니다. 시인 봉주연은 단언한다. "우리는 모두 이불에서 태어난걸요. 천에서, 유연함 속에서."
2023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으로 등단한 봉주연의 두 번째 시집 『우리는 모두 이불에서 태어난걸요』가 문학과지성 시인선 622번으로 출간됐다. 첫 시집 『두 개의 편지를 한 사람에게』(현대문학, 2024)에서 무한한 마음을 띄워 보낸 시인이 이번엔 그 마음이 닿고자 했던 곳곳의 주소들을 펼쳐 보인다.
이 시집의 핵심은 '장소'다. 하지만 단순한 지리적 좌표가 아니다. "한 사람의 생애를 요약하면 장소들이 남는다. 잘 자라다 가요"라는 구절처럼, 시인이 그리는 장소는 그곳에서 먹고 자고 웃고 떠든 자취가 새겨진 '주소력(住所歷)'이다. 단순히 주소를 기록한 '주소록'이 아니라 그곳에서 지내며 겪은 시간까지 내포하는 개념이다.
시인의 시 세계에서 "친밀함은 지도가" 되고, 그 지도를 그리는 재료는 의외로 '천'이다. "우리 모두의 공통된 유래"로 태어난 곳이나 자라온 곳 대신 천을 지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천에는 부재의 형태를 지탱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커튼은 "내가 잠들기 전에 하는 버릇"과 "잠이 들 때 짓는 표정을 알고", 천막은 "인형의 얼굴"이 아닌 "뒷목에 담겨 있는 고백"을 본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이별과 성장에 대한 시인의 시선이다. "어떤 장소는 사람과 같아서 떠나야 할 때를 인정해야 해"라는 인식 속에서 주체들은 "한곳에서 시작된 불씨는 그 장소에서 끝이 나야" 한다는 필연성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것은 포기나 체념이 아니다. "방을 떠난 이후에 방을 실감"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아쉬워하면서도 떠나고, "내일 현관문을 열었을 때도 오늘과 같이 이 집을 사랑하기 위하여" 언제라도 새로운 곳으로 갈 준비가 되어 있다.
이 시집에서 자주 등장하는 '계단'이라는 소재도 흥미롭다. 부동성과 이동성을 동시에 지닌 계단은 현재에 유비된다. "나선계단을 오르면 어느 날에는 레코드 가게가 되었다가 어느 날엔 거실이 되고, 어느 날엔 헌책방이 됩니다"라는 믿음은 일종의 "곡해"일지 모르지만, 그 맹목이야말로 "기어코 살아낸 시간과 겪어낸 장소들이 남긴 결과"다.
무언가를 돌보지 않으면 못 견딜 것 같을 때의 마음도 섬세하게 포착한다. "동물 기를 자신도 없고 베란다엔 식물 하나 없는 주제에. 사람을 불러서 저녁을 차려준다. 전골이 끓고 있는 좁은 식탁에 사람을 앉힌다. 밥을 다 먹고 나선 귀를 파줄게요. 담요로 베개를 만든다."
시인이 당선 소감에서 밝힌 대로 "장소마다 아이가 있습니다. 한때 나였으나 더 이상 내가 아닌, 작은 사람"들을 향해 "잘 자라다 가요"라는 차분한 온도의 작별을 건네는 이 시집은, 끝끝내 찾아올 이별을 유예하며 하루하루 새로운 마주침을 기대하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총 52편의 시를 4부로 나눠 묶은 이 시집은 생의 질감과 세부를 촘촘하게 포착하며 "섬세한 온기로 친밀함의 지도를 펼쳐내는" 봉주연만의 시 세계를 보여준다.
최준혁
언론출판독서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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