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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가장 어두운 순간에서 길어 올린 빛” 『편의점에서 잠깐』 출간(창비)
정호승, 3년 만의 신작 시집… 패배와 어리석음 속에서 발견한 사랑의 언어
편의점에서 잠깐
지난 반세기 동안 정호승은 한국인의 마음을 가장 깊이 어루만져온 시인이다. 『슬픔이 기쁨에게』,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등 수많은 시집으로 세대와 시대를 넘어 독자들을 위로해왔다. 3년 만에 펴내는 신작 『편의점에서 잠깐』(창비)은 그의 시를 기다려온 독자들에게 각별한 선물이 된다.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더 이상 시를 못 쓰게 될 줄 알았다”고 고백하지만, 고갈된 줄 알았던 샘에서 다시 길어 올린 언어들은 더 단단하고 깊어진 울림으로 다가온다.
이번 시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지점은 역설의 힘이다. 「패배에 대하여」에서 시인은 “나는 패배가 고맙다”고 노래하며, 패배했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고, 사랑할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이는 세상의 승자독식 논리를 뒤집는 강렬한 선언이다. 「추락」에서는 “추락을 경험해보지 않은 새는 날지 못한다”고 말하며 실패와 이별을 삶의 필수 조건으로 받아들인다. 오연경 평론가의 말처럼, 그의 언어는 “넘어지고 당하고 망가지며 살아남은 우리에게 선물 같은 위로”가 된다.
정호승의 시는 화려한 장식이 아닌 일상의 사소한 풍경에서 출발한다. 편의점 계산대 앞에서 스쳐가는 옛 연인, 한 그릇 순댓국 앞에서 문득 떠오르는 지난 이별, 새벽 연필을 깎으며 다듬는 분노의 감정. 그는 그 모든 일상적 장면들을 삶의 본질로 끌어올려 독자에게 내밀한다. 「순댓국을 먹으며」에서 “이별이라는 과거도 아름답다”고 말하고, 「연필을 깎으며」에서 “죽은 나뭇가지 같은 분노를 깎아낸다”고 고백하는 순간, 우리는 일상이 시가 되는 체험을 한다.
이번 시집의 또 하나의 특징은 성자의 언어가 아닌 인간의 목소리에 있다. 시인은 “사랑은 용서로써 완성된다”고 노래하면서도, 「당신의 잔」에서는 “나는 결국 사랑보다 증오의 사람입니다”라고 토로한다. 완벽히 다스려지지 않는 감정까지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솔직함은, 오히려 독자에게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그는 성자의 초월이 아니라, 흔들리고 실패하는 인간의 자리를 지키며 독자를 위로한다.
장세환
언론출판독서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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