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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검열의 상흔, 『향산집』에서 드러나다
붉은 잉크로 지워진 단어들, 지워지지 않는 민족의 기억
한국국학진흥원 제공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출판 검열을 그대로 보여주는 문집 『향산집』이 그 실체를 드러냈다. 책자 곳곳에는 붉은 글씨로 줄을 긋거나 원을 그린 흔적이 남아 있고, 행의 위에는 ‘삭제(削除)’라는 붉은 도장이 찍혀 있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까지 일제의 눈에 맞지 않으면 가차 없이 지워지던 시대의 공기가 고스란히 배어 있다.
일본은 1909년 ‘조선 출판법’을 제정해 한반도에서 발간되는 모든 출판물을 사전 검열했다. 퇴계 이황의 후손 이만도(1842~1910)의 문집 『향산집』도 그 대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 문집은 1931년 조선총독부에 제출돼 검열을 받았고, 본집 2책과 별집 1책 등 3책이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 소장돼 있다. 검열본에는 임금을 뜻하는 ‘금상(今上)’, ‘성상(聖上)’ 같은 표현이나 임진왜란 관련 구절이 민감한 문구로 분류돼 줄줄이 삭제됐다.
당시 일본은 단순한 단어 삭제를 넘어, 조선인들의 사상과 의지를 꺾고 독립운동 정신을 차단하려 했다. 『향산집』이 곧바로 간행되지 못하고 1948년 해방 이후에야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것도 검열의 여파였다. 그러나 붉은 잉크로 지운 흔적은 역설적으로 일제의 통제 의도와 조선 지식인들의 분투를 동시에 증언한다.
한국국학진흥원 관계자는 “향산집은 일본의 폭력적인 출판 검열에 저항한 독립운동가들의 분투를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며 “잊혀 가는 검열의 역사와 민족의 기억을 오늘날에 다시 새기는 계기”라고 말했다.
장세환
언론출판독서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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